2008년 07월 19일
장난칠 때도 화장실서도 혀 굴리는 꼬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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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gles, sit down nicely. Today we’re gonna do math. Open your books, page 114(독수리반 여러분, 모두 자리에 반듯하게 앉으세요. 오늘 우리는 수학을 공부할 겁니다. 114쪽을 펴세요).”
서울 서초동에 자리한 A영어유치원(법적으로 영어유치원은 유아를 대상으로 한 어학학원으로 분류되지만 관행상 영어유치원으로 부른다)의 만 6세 반. 체육수업을 마치고 들어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20명의 아이들이 자신의 몸통만한 수학책을 들고 각자의 자리에 앉는다.
이날 수학 수업은 등호와 부등호에 대한 내용. 외국인 선생님이 부등호 ‘>’와 ‘<’의 모양을 설명하면서 “배고플 때 쿠키가 많은 쪽을 향해 입을 크게 벌려야 더 많이 먹을 수 있다”며 비유적으로 말하자, 아이들은 “If you do that, You’re getting fat(살쪄요)” “Then you need a diet(그럼 다이어트해야 해)”라며 농담을 던진다.
이 학급의 아이들은 만 4세부터 영어강의를 들어왔다. 교재로 쓰는 미국 초등학생용 수학교과서가 만 6세 아이에게 벅차지 않을까 싶지만 몇몇 아이는 “I learned it at home(집에서 배웠어요)”이라고 말한다.
월 90만~150만원 등록금 내고 국어는 별도 과외
“Don’t speak Korean(한국어 쓰지 마세요).”
누군가 한국어로 얘기하자 선생님이 주의를 준다. 이곳에서 한국어는 금지어다. 외국인과 영어로 유창하게 대화할 수 있는 한국인 선생님의 또 다른 수업도 100% 영어로 진행된다. 하지만 선생님이 주의를 주지 않더라도 이곳에서 6개월~1년 이상 교육받은 아이들은 대부분 친구와 얘기할 때나 장난칠 때,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영어를 사용한다. 유치원의 한 선생님은 “아이들이 학원에 오면 코드가 바뀐다”고 설명한다. 아이들은 ‘hey’ ‘uh-uh’ ‘woops’ 같은 의성어도 자주 쓴다.
A영어유치원은 만 4~6세 아동을 대상으로 하며 현재 300여 명이 재학 중이다. 일반 유치원처럼 3월 초 학기가 시작되는데, 만 4세부터 꾸준히 수업을 들은 아이, 만 5세에 시작한 아이, 만 6세에 시작한 아이 등으로 수준에 맞게 반을 꾸린다. 중간에 입학을 원할 경우 레벨 테스트를 거치게 되며, 자리가 날 때까지 ‘waiting’해야 한다. 영어실력이 모자라면 그조차 불가능하다.
최근 영어유치원들은 영어 환경을 만드는 데 특히 신경 쓴다. 보통 아침 9시30분부터 오후 2~3시까지 30분 단위로 진행되는 수업은 읽기, 쓰기, 발음교정 등 영어학습이 주를 이루지만 이게 다는 아니다. 영어를 매개로 수학 음악 미술 체육 등 다양한 수업이 펼쳐지는 것. 더불어 아이들은 영어 동화책을 읽고 영어로 그림일기를 쓰며, 점심시간에는 식탁에 앉아 ‘Lunch song’을 부른다.
이곳 아이들은 모두 Paul, Jennifer, Charlie, Lucy 같은 이름을 갖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 발맞춰 전문가에게 영어 작명을 의뢰하는 등 고심해 지었다는 부모들도 많다(강남 일부 작명소에는 아이의 영어 이름 작명을 의뢰하는 부모도 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성호, 현주 같은 한국 이름을 사용하는 아이도 있지만 이조차 외국인 선생님의 발음에 따라 ‘썽오’ ‘횬주’처럼 영어화해 부른다.
A영어유치원의 이보영 원장은 “서울 강남의 경우 이런 형태의 영어유치원이 10여 년 전부터 꾸준히 성장세를 보여왔다”고 말한다. 이 원장에 따르면 이경숙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의 ‘아륀지’ 발언으로 연초부터 떠들썩했던 올해는 만 4, 5세 신규반 학생 수는 증가한 반면, 만 6세 신규반은 오히려 줄었다. “영어유치원에 관심 있는 부모는 아이가 만 6세가 되기 전에 보내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어유치원을 선호하는 부모들은 “언어가 체화되려면 어릴 때 영어를 시작할수록 좋다”는 믿음이 강하다. 그래서 최근엔 만 4세 이하 영유아를 대상으로 한 영어유치원도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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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과외를 시키기 때문에 그 이상의 비용이 들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아이를 영어유치원에 보내는 부모는 대부분 “자녀가 영어를 통해 더 많은 기회를 누리길 바란다”고 말한다. 만 6세인 외아들을 영어유치원에 보내고 있는 김모 씨는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쯤 조기유학을 보낼 생각이다. 김씨는 “아이가 스트레스 받지 않고 공부하길 원한다. 그리고 유학 뒤에 한국이든 해외든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선택의 폭이 넓은 것 같다”고 말했다.
아이를 영어유치원에 보내는 부모에게도 고민은 있다. 아이의 국어실력이나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력도 우려되는 부분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어유치원 학생들은 보완책으로 태권도를 배우거나 국어 또는 독서 과외를 받는다.
박정희 씨는 영어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첫째아이에 이어 만 3세인 둘째아이도 영어유치원에 보내고 있다. “만 5세부터 영어유치원에 다닌 첫째아이의 영어실력에 만족한다”는 박씨는 “둘째아이는 좀더 일찍 좋은 교육을 받게 하고 싶다”는 생각에 집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유아 전문 영어유치원을 찾았다. 맞벌이 부부인 그는 “좋은 베이비시터를 고용하는 비용도 적지 않기 때문에 차라리 좀더 보태 영어유치원에 보내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첫째아이는 영어에만 집중하고 국어에 신경 쓰지 않아 초등학교 진학 초기에 또래보다 뒤처져 어려움을 겪었던 만큼 둘째아이는 방문 국어교육을 시킨다”고 덧붙였다.
“모국어 소홀히 하면 정체성 혼란 올 수도” 일부 전문가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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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데, 경우에 따라 아이의 보육을 돕는 부담임 교사가 함께 교실에 배치되기도 한다.
영어교육에도 유행은 있다. 최근에는 영국식 발음, 유럽 스타일 교육이 인기를 끌면서 영국 사립유치원을 표방한 교육기관이 학부모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특수목적고 열풍에 맞춰 특목고반을 편성한 영어유치원도 생겼다.
영어유치원을 졸업한 아이들은 대부분 사립학교나 외국인학교에 진학하며, 간혹 조기유학을 떠나기도 한다. A영어유치원의 한 관계자는 “한 반 20명 가운데 3~4명이 외국인학교에 입학하며 대부분은 사립초등학교에 들어간다”고 전했다. 이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영어의 끈을 절대 놓지 않는다. “공교육에 기대할 것이 없다”는 부모들을 겨냥해 일부 영어유치원은 졸업생을 대상으로 방과후수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영어유치원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다양하다. 영어 조기교육을 찬성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일부 학자들은 어린 시절의 외국어 학습이 모국어 발달에 해를 끼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유아이중언어교육학회 이경우 회장은 “아이는 언어 습득 능력을 갖고 태어난다. 그 덕에 어린아이는 이중언어를 습득할 수 있으며, 우리말과 영어를 동시에 배우는 데 문제가 없다”면서 “단 우리나라는 EFL(English as a foreign language) 환경이기 때문에 영어유치원에 대해선 좀더 신중해야 한다”고 밝혔다.
반면 동덕여대 김인석 교수(영어교육학)는 “어린 시절 외국어 습득이 발음 면에서는 나아 보일지 모르지만, 그때 배운 언어는 한계가 있다”면서 “인지능력 발달에 써야 할 에너지를 언어학습에 쏟아부으면 해당 나이에 발달해야 할 부분이 뒤늦게 돼 오히려 손해”라고 주장했다.
이 밖에 “모국어를 소홀히 하면 자칫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중앙대 박찬옥 교수(유아교육)는 “언어는 사고를 담는 그릇인 만큼, 유아의 언어발달 단계에서 온전한 정체성이 심어지지 못한다면 세계 시민이 되기 전에 국제 미아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의 ‘잉글리시 디바이드(English divide)’는 점점 심화되고 영어 압박은 커지고 있다. 팽팽한 찬반양론 속에서도 영어유치원이 ‘신기한 교육 열풍’ 단계를 지나 하나의 선택으로 자리잡게 된 이유일 것이다.
구가인 기자 comedy9@donga.com
# by | 2008/07/19 21:49 | 교육소식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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